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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ulture Chanel - 장소의 정신 ]

- By CFT 염승희

Sep 05. 2014
[ Culture Chanel - 장소의 정신 ]

문화 샤넬전은 장-루이 프로망이 기획을 맡아 2007년에 시작된 시리즈 형식의 전시회로, 가브리엘 샤넬의 독특한 삶과 창조적 여정, 그리고 샤넬 하우스의 역사 속으로의 탐험을 제안하고 있다. [ 문화 샤넬전 - 장소의 정신 ]은 가브리엘 샤넬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던 장소들을 통한 샤넬 하우스의 창조적 언어에 초점을 맞춘다. 총 10개에 이르는 전시 공간은 샤넬의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장소를 대변하며, 샤넬의 패션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CULTURE CHANEL

 :: 장소의 정신 ::


전시 기간 : 2014년 08월 30일 -10월 5일

전시 장소 :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전시 시간 : 월-일, 오전 10시 - 오후 6시


▲ 전시장 내부 모습, DDP


▲ 전시장 입구 모습, DDP


▲ 전시 카달로그 / 전시 오디오 가이드를 위한 QR코드


- 장소의 오브제 -
 
" 사물은 사람처럼 자기 그림자가 필요하다 "  가브리엘 샤넬


' 내가 좋아하는 건, 길을 떠나는 거야 ' 그녀는 이렇게 털어놓곤 했다. 가브리엘 샤넬은 방랑자이다. 그녀는 소뮈르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그 곳에 오래 머무르지는 못하고 평생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방랑벽을 지니고 살았다. ... 어디서나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자신을 발견한다.


패션은 뚜렷한 동기가 있기 때문에 시나 회화처럼 정신적 만족에 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패션은 온전히 내면적인 필요의 산물이 아니라, 세상을 만나러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샤넬에게 있어 패션은 삶의 행동 양식 같은 것이었다.


" 파리에서처럼 로잔에서도 잠깐 머무르는거야. 내가 결코 정착하는 법이 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나는 자유를 선택했어! " 샤넬은 말년의 절친한 벗이었던 클로드 들레이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외면적이기보단 내면적인 이 방랑벽은 은연중에 나타난다. 샤넬이 자신의 출발점과 발자취를 서술하지 못했고, 잇따른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녀 생전에는 한번도 회고록을 내지 못했다. 그녀의 뿌리는 바로 이 고정할 수 없는 장소, 그녀가 절대 말하지 않았던 유년기의,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 있다. 가야 할 곳을 알고 있기에 자신이 지나 온 곳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샤넬의 진정한 장소는 여기, 그녀의 창작물 안에 있다. 그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 작품들 속에는 그녀의 분신들이 있다. 그것들은 샤넬이 말한 바와 같이 자기 그림자가 필요하다. 바로 다른 사물들, 장식품들, 샤넬의 오브제들이다. 샤넬은 오브제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제2의 의상처럼 주변에 두는 것을 좋아했다. " 인테리어란 사람의 마음을 자연스레 투영하는 것이야. 발자크가 옷차림만큼 인테리어를 중시한 것은 옳은 일이었어. " 문학을 사랑한 샤넬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므로 그녀가 정착한 깡봉 가 31번지의 인테리어를 살펴보는 것은 거기에 투영된 그녀의 마음을 풀어내는 것이다. " 나는 집을 지고 다닌다. 어디를 가든 꼬로망델 두 폭과 책 여러 권을 항상 가지고 간다. " 샤넬의 오브제들은 그 울림으로 그녀의 자취를 읽어낼 수 있게 해준다.


그녀가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한 숫자가 5이니, 그 중에서 다섯 개를 살펴보도록 하자.

바로 거울, 크리스탈, 꼬로망델, 서적 그리고 푹 파묻히는 소파이다.


▲ 계단에 있는 가브리엘 샤넬 사진, 파리 깡봉가 31번지 @1962 Douglas Kirkland


우선 샤넬이 언급한 적은 없지만, 곳곳에 있는 거울들이다. 깡봉 가 31번지의 입구, 그녀의 아파트 문까지 이르는 계단은 바로 이 거울들로 빼곡히 덮여 있다. 샤넬은 거울들을 벽면처럼 활용하여 그 위에 다른 거울이나 괘종시계를 걸어두었다. 샤넬은 침실이나 파우더룸 같이 개인적인 공간의 문 뒷면에도 거울을 두었다.



▲ 가브리엘 샤넬 아파트의 샹들리에, 파리 깡봉가 31번지


다음은 거울들을 연장하고 배가시키는 크리스탈이다. 곳곳에서 볼륨감 있게 투명한 우윳빛으로 반짝이는 크리스탈들은, 병풍과 서적들로 인해 어두워진 분위기를 밝혀준다. 천연 수정이든, 유리든 가리지 않고 샤넬은 샹들리에, 거울, 램프, 십자가를 크리스탈로 장식했다. 거실 중앙에 달린 샹들리에는 그녀가 디자인한 유일한 오브제로, 제2의 의상인 실내 장식의 커스텀 주얼리이며 공중에 매달린 브로치이다.


▲ 가브리엘 샤넬 아파트의 꼬로망델, 파리 깡봉가 31번지


꼬로망델은 샤넬이 한눈에 반한 첫 번째 오브제이다. " 처음으로 꼬로망델을 봤을 때,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라고 외쳤다. 그 어떤 물건에 대해서도 해본 적이 없는 말이다. " 꼬로망델은 전형적인 방랑자의 가구라 할 수 있다. "  꼬로망델은 중세의 테피스트리와 같은 역할을 해서, 어디서든지 자신의 집을 재현할 수 있게 해준다. " 외부의 시선과 외풍을 막아주는 꼬로망델은 친밀함과 안락함을 위한 가구이기도 하다. 꼬로망델에 대한 샤넬의 애정은 실로 각별해서, 원래의 기능에서 벗어난 용도로 활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 가브리엘 샤넬 아파트의 책장, 파리 깡봉가 31번지


이제 서적들 차례이다. 꼬로망델과 마찬가지로, 책들은 섬세한 빛을 발한다. 서가에 지열된 책들은 꼬로망델이 미처 가리지 못한 곳들을 덮어주고 있다. 책은 그녀가 접했던 첫 번째 오브제였고,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통틀어 그녀가 가질 수 있었던 몇 안되는 물건 중 하나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읽었다. " 라고 즐겨 말하곤 했다. 제목들만 훑어 보아도 여러 영역을 넘나든다는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 현실은 나를 꿈꾸게 해주지 않지만, 나는 꿈꾸기를 좋아한다. "


▲ 가브리엘 샤넬 아파트의 거실, 파리 깡봉가 31번지


마지막으로 소파, 깡봉 가 31번지 아파트에서의 생활은 이 크고 널찍하며 깊숙이 앉아지는, 의자 같기도 하고 침대 같기도 한, 일반적인 크기를 뛰어넘는 소파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샤넬은 인테리어에 있어 자신이 생각하는 호사스러움의 개념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로 기술하고 있다. ' 깊숙한 소파들, 그리고 윤이 나는 대리석이 깔린 널찍한 현관이 주는 호사스런 안락함' 31번지의 소파는 이처럼 특별한 그녀만의 개념에 비율을 맞춰 주문 제작된 것이다. " 나의 가장 멋진 여행을 나는 이 소파 위에서 한다. " 아파트에서 그녀가 독서를 하던 유일한 장소는, 그녀가 누워서 책을 읽던 소파였다.


- 가브리엘 샤넬, 창조의 여정 -


1. 유년기의 인상

유년기의 어떤 것, 좋은 밀을 향하는 이 욕망은, 짧은 목걸이에 있는 인조보석으로 두른 황금빛 금속 밀이나, 은제 밀이삭, 마요르카 섬의 진주와 인조보석으로 만든 브로치 같은 데서 이처럼 다시 나타난다. 옷 위에서 빛을 발하는 이러한 패션 주얼리의 화려함은 과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의 수많은 디테일은 가브리엘 샤넬을 특징짓는 실용적이고 방랑자적인 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 로베르 구상, 부들 잎과 밀이삭 다발 (1960) / 1996 S/S collection / 2010 S/S rdw / 기병학교, 기병학교의 마술 교관들 (1907)_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1996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선보인 작품들, 금사로 수놓은 푸른 망사 원피스, 밀 이삭으로 장식한 2.55백, 이 모티브를 다시 취한 안경테처럼, 이 밀은 오늘날에도 칼 라거펠트가 샤넬을 위해 디자인한 작품들 속에서 브랜드 정체성을 나타내 주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 그들처럼 농민 정신이 강한 이곳 출신인 그녀는, 그들을 묘사하는 게 곧 그녀에 대한 묘사가 되어버릴 정도로 모든 특성이 그들과 유사했다. 체형, 활기, 완벽에 대한 집착, 생산에서 느끼는 기쁨, 엄격함, 권위적인 말투, 고집, 맹렬함에 열정까지 모든 게 그들과 똑같았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직업 때문에 변함없는 계절의 질서에 순응했으며, 매사에 일이 우선이었다. 다산인 농민의 후손 가브리엘 샤넬은 수많은 여성들의 각광을 받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
- 에드몽드 샤를-루(EDMONDE CHARLES-ROUX)의 저서, 자유분방한 샤넬의 인생, 1974


2. 오바진의 규율

가브리엘 샤넬의 어머니는 그녀가 고작 열두살일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오바진 수도원의 고아원에 그녀를 버린다. 아버지와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샤넬은 이런 상처를 창조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 칼 라거펠트, 리틀 블랙 재킷을 입은 프레하 베하 (2012)


얽힌 문양으로 장식된 오바진 수도원의 12세기 스테인드글라스는 어린 가브리엘의 몽상 속에서 추후 자신의 모노그램인 겹쳐진 더블 C의 모델을 제공해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더 명백한 것은, 가브리엘 샤넬이 오바진 수녀들에게서 한결같은 수녀복의 색상인 검은색과 흰색을 차용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N˚5 향수의 포장, 화이트칼라와 커프스를 단 리틀 블랙 드레스 그리고 배색 트위드 투피스에 이 색상들을 사용했다. 그녀의 고아원 원복, 수녀복의 기능성과 그 순수한 라인뿐만 아니라, 전례복과 전례 용품들의 화려함도 샤넬의 작품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오바진 수도원은 샤넬 스타일에 첫 번째 무기를 쥐어주었던 곳이다.


▲ 샤넬 더블 C 로고에 영감을 준 12세기 오바진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부분 복제 (2011)


<< 그리고, 아이들은 흑백으로 된 세계의 문 속에 갇혀 있었다. 빨고 또 빨아 늘 얼룩 하나 없이 깨끗했던 고아원 소녀들의 셔츠는 흰색이었다. 오래 입을 수 있고 큰 보폭으로 걸을 수 있도록 굵게 주름 잡힌 치마는 검은색이었다. 수녀들의 베일과 소매가 넓은 수녀복도 검은색이었다. 아!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진 그 소매들이라니. 접힌 소매 주름 속엔 손수건이 감춰져 있었지.. 하지만 수녀들의 머리에 두른 띠와 스탠드 칼라 모양의 넓은 가슴받이는 눈이 부시도록 하얬다. 긴 복도들과 회칠한 벽도 흰색이었다. 하지만 공동 침실의 높다란 문은 검은색이었다. 어찌나 짙고 고상한지 한번 보면 영원히 기억에 남을 그런 검은색. 오바진은 그런 곳이었다. >>
- 에드몽드 샤를-루(EDMONDE CHARLES-ROUX)의 저서, 자유분방한 샤넬의 인생, 1974


3. 다름이 주는 자유

가브리엘은 스무 살이 되자 자유로운 파리 생활을 꿈꾸며, 고아 출신에 시골뜨기 소녀 티를 여전히 벗지 못한 채 가난하게 생활해 나가는 자신의 모습에 싫증을 느낀다.


▲ 윌리엄 클레인, 샤넬 1960 F/W 투피스를 입은 도로테아 맥고완 (1960) / 스티븐 마이첼, 샤넬 1985 S/S 드레스를 입은 니콜 키드먼 (2001)


<< 그녀의 의지는 이미 확고했고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도 확신을 하고 있었다. 명성을 얻는 것, 이베트 길베르(Yvette Guilbert)처럼 방에서 바느질을 하다 무대 위에서 각광받게 되는 것, 가수로 성공하는 것.. 물랭 시절부터 가브리엘은 더욱 더 명확한 야망을 품었을 수도 있다. 뮤직홀을 거쳐 오페레타 가수가 되는 꿈. 그러기 위해서는 떠나야 했다. >>
- 에드몽드 샤를-루(EDMONDE CHARLES-ROUX)의 저서, 자유분방한 샤넬의 인생, 1974


'벨 에포크'는 가브리엘 샤넬에게 있어 발견과 해방의 시기이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샤넬은 서서히 시골을 떠나 파리에서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여성복을 전문으로 하는 의상실에 취직한 가브리엘 샤넬은 그곳에서 의상에 대한 안목을 키우게 된다. 하지만 가수가 되고 싶어 했던 샤넬은 '라 로통드'라는 뮤직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다른 인생을 살기 위한 그녀의 첫 번째 시도는 이것으로 끝나게 된다. 자유분방하고 매혹적인 여성인 미시아 세르와 샤넬의 본이 될만한 우정은 평생에 걸쳐 이어졌고, 미시아가 그녀에게 알려준 예술계 사람들은 샤넬의 진정한 가족이 되었다.



▲ 2005 F/W 울 트위드 원피스, 2006 F/W 울 트위드 재킷, 1960 F/W 울 트위드 재킷


샤넬은 자신을 잘 알았고, 남과 다르기를 원했으며, 다른 여성들을 놀라게 하고 매료시키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련된 자태를 만들어냈다. 완연한 자립을 위해 샤넬은 1909년, 파리에서 모자 디자이너가 되었다. 1913년에는 저지를 소재로 한 옷들을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이는 궁극적으로 다름과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 벨 에포크 '의 종말과 샤넬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패션의 역사에 있어 결정적인 대전환이었다.


4. 성에서의 삶

가브리엘 샤넬은 에티엔 발장과 함께 물랭을 떠난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에티엔 발장은 토지 임대료로 먹고 살고 경주마도 소유하고 있는 청년이었다.

▲ 르와얄리유 살롱에 있는 가브리엘 샤넬, 에티엔 발장 그리고 보이 카펠


<< 르와얄리유에 초대를 받으려면 쾌활한 성격에 항상 부츠를 신고, 며칠이건 온종일 말을 탄 채 숲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달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르와얄리유? 유쾌한 친구들의 무리들. 하지만 이 친구들과 승마와 웃음과 쾌락을 빼면 아무것도 없었다. >>
- 에드몽드 샤를-루(EDMONDE CHARLES-ROUX)의 저서, 자유분방한 샤넬의 인생, 1974



▲ 말을 타고 있는 가브리엘 샤넬 (1910)


그렇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가브리엘 샤넬은 자신의 다름을 만개시킬 수 있었다. 르와얄리유에서 보낸 시간은 그녀가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데 있어 중요하고도 결정적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일을 하겠다는 의지와 결의를 다졌고 자신의 창작 능력을 처음으로 발휘해볼 수 있었다. 가브리엘 샤넬은 르와얄리유에서 승마의 세계와 성에서의 삶, 아무 걱정근심도 없고 할 일도 없는 그런 삶을 만나게 된다. 사교계의 스포츠 행사였던 경마대회가 열릴 때면 그녀는 둥글고 납작한 밀짚모자, 남성적인 실루엣의 넉넉한 외투, 멜빵에 매단 쌍안경 같은 단순한 옷차림으로 자신만의 독특함을 드러내 보이곤 했다. 이 당시부터 예측불허에 야생마 같은 샤넬의 비범한 성격은 이미 모든 르와얄리유 방문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중의 여성 방문객들은 샤넬이 1910년 파리에 모자 가게를 열었을 때, 첫 고객이자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다.

▲ 1986 F/W 드레스, 2013 F/W 실크 오간자 투피스, 2011 F/W 퀼팅 보디수트, 1986 F/W 투피스 


5. 파리에서의 독립

1910년경, 샤넬은 처음으로 성공을 맛본다. 보이 카펠과 연인 사이가 되고, 그이 후원에 힘입어 파리에 모자 전문점을 연다.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큰 모자를 쓴 여자 (1916) / 조르주 그루사, 가브리엘 샤넬과 탱고를 추고 있는 켄타우로스의 형상을 한 보이 카펠 (1913)


<< 그녀들은 인근 저택들을 방문하고, 폴로 클럽에서 차를 마시며, 도도하게 경마장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긴긴 오후 시간을 보내곤 했다. 경마장에 갈 때는 하얀 린넨 드레스를 입었는데, 도톰하게 자수를 놓은 데다 발랑시엔 레이스 띠로 이어진 직물로 만들어진 이 드레스는 하녀들에게는 악몽 같은 옷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유행에 따르려면 단추 끼우개를 가지고 애를 써야 겨우 잠기는, 스트램이 네 개나 되는 뾰족한 구두를 신어야 했고, 상의에는 진주 목걸이를 세 줄로 길게 늘어뜨리고 손에는 양산을 들어야 했다. 또한, 우아한 여성이라면 브뤼셀 레이스로 된 모자에 타조 깃털이나 모슬린으로 만든 장미를 장식해야 격에 어울리는 차림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패션이 유행하던 1913년 당시, 가브리엘 샤넬은 아서 카펠(Arthur Capel)의 독려와 후원에 힘입어 도빌 중심가에 매장을 열게 되었다. 매장이 위치했던 공토-비롱가는 대표적인 번화가로 지금도 최고급 호화 휴양지인 노르망디와 엄청난 판돈이 오가는 카지노의 경계가 되고 있다. >>
- 에드몽드 샤를-루(EDMONDE CHARLES-ROUX)의 저서, 자유분방한 샤넬의 인생, 1974

 

▲ 칼 라거펠트, 2005 S/S 릴리 도날슨 / 파라드 발레 포스터 앞의 피카소와 올가 (1919)


1913년은 여러 가지 이유로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샤넬은 패션에 있어 그 전환점을 표상하는 인물이다. " 한 세계가 끝나고,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있었다. 기회가 찾아왔고, 나는 그 기회를 거머쥐었다. 나는 이 새로운 시대와 같은 나이였다. 그래서 이 시대가 내게 의상으로 표현해 달라 호소한 것이다. " 샤넬은 새로운 스타일의 지표를 제시하며 19세기 패션에 종지부를 찍었다. 요란한 장식의 시대가 지나가고 편안함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 시대적 흐름 속에서 샤넬의 의상은 확실하게 자리를 잡는다. 우아하고 편안한 그녀의 스타일은 시대가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6. 베니스의 보물

샤넬은 1919년 12월 22일 보이 카펠이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잠기고 만다. 1920년 8월, 미시아와 카탈로니아 출신 예술가인 그의 남편 조세 마리아 세르가 샤넬에게 자신들과 함께 베니스로 가자고 제안한다.

▲ 윌리 리조, 가브리엘 샤넬 (1960) / 마이크 드 뒬멘, 깡봉 가 31번지의 거실에 있는 가브리엘 샤넬의 옆얼굴 초상 (1957)


<< 베니스는 샤넬이 마음 속에서 유일하게 이국의 수도 반열에 올려놓은 도시였다. 그 경관의 비현실성이 그녀를 자기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는 점에서 경관의 뛰어남을 인정했던 것일까?' 베니스 ' 를 언급할 때면 그녀는 무명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불과 몇 달 만에 미시아(Misia)에 비길 만큼 유명해졌던 그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왜냐하면 샤넬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베니스보다도 디아길레프(Diaghilev), 즉 다른 그 무엇보다도 예술계의 황제 세르게이(Serguei)와의 만남이었다. >>
- 에드몽드 샤를-루(EDMONDE CHARLES-ROUX)의 저서, 자유분방한 샤넬의 인생, 1974



▲ 베니스의 사자상 (19C-20C) / 지오바니 코너 총독이 코르푸의 대위, 비토레 다모스토에게 하는 전언, 베니스 박물관 (1715)


샤넬은 베니스로의 첫 여행에서 뜻밖에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녀는 베니스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토르첼로 바실리카 성당의 빛바랜 금빛 모자이크와 눈부시게 아름다운 산 마르코 대성당의 모습은 어린 시절 오바진 수도원에서 보았던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호성인 산 마르코의 상징이자 베니스를 상징하는 동물인 날개 달린 사자는 8월 19일, 사자자리에 태어난 그녀와 우연의 일치를 이루었다. 또한 리도 해변에서 이어나간 국제적인 사교계 생활은 도빌에서의 생활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발레뤼스(러시아 발레단)를 창단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만난다. 그는 훗날 샤넬의 절친이 된다.


7. 러시안 페러독스

1915년 샤넬은 보이 카펠과 함께 가게 된 비아리츠에 그녀의 첫 패션 하우스를 개점한다.


▲ COCO CHANEL 꼴라주 (1921) / 블라디미르 레빈더, 러시아 풍의 블라우스를 입은 가브리엘 샤넬 (1923)


<< 카펠이 기반을 닦은 샤넬 제국은 건재했다. 비아리츠 매장의 매출액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가브리엘이 그곳에 머무르는 것은 당연했다. 로마노프 가문 사람들 몇몇이 과거 영화를 누리던 시절 휴가를 보내던 바스크 연안에 다시 온 것도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그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
- 에드몽드 샤를-루(EDMONDE CHARLES-ROUX)의 저서, 자유분방한 샤넬의 인생, 1974



▲ 샤넬 N˚5 향수병 (1924) / N˚5 향수 라벨 (2013)


샤넬은 비아리츠에서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조카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을 다시 만나, 1922년까지 연인 관계로 지낸다. 그녀는 드미트리의 주선으로 러시아 궁정의 전속 조향사였다가 거처를 그라스로 옮긴 에르네스트 보를 만나, 그에게 자신의 첫 향수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고, 1921년 ‘샤넬 N˚5가  탄생한다. 한편 대공과 만나면서 접했던 러시아 문화는 이후 샤넬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가 놓인 러시아 전통 블라우스와 군복 상의를 자신만의 감각으로 재해석해 여러 제품 라인을 선보이는가 하면, 1928년 샤넬 전속 직물 디자인 회사인 ‘샤넬 직물’을 세울 때에도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 일리아 즈다네비치, 샤넬 직물을 위한 연구와 데생이 담겨있는 작업 노트 (1927) / 일리아 즈다네비치, 샤넬 직물을 위한 초벌 그림 (1928)


8. ' 블루 트레인 '

'블루 트레인'은 영국과 리비에라, 그리고 세련되고 활동적인 가브리엘 샤넬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다.



▲ 2010 Cruise 스트라이프 원피스 / 메종 르마리에, 화이트 까멜리아 (2014)


<< 그것은 그녀가 급속도로 영국의 환경에 거의 매료되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곳에서 받아들인 것을 제대로 헤아릴 줄 알았고, 이튼 홀도 금세 편안하게 느껴졌다. 영국 생활 초반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 중세 분위기로 가득 채워진 성의 건축 양식이라든가 그 모든 기상천외함에 애착을 갖게 될 정도였다. 이러한 실내 장식에서 배어 나오는 기사도 소설의 장면 같고 빅토르 위고 드라마의 격정적인 시풍 같은 것, 그녀는 그것을 망각해버렸다. 샤넬이 그 곳에 머무를 때마다 미시아가 비꼬듯 얘기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점에 관해서였다. 미시아는 웨스트민스터 가의 사람들에게는 맥베스적인 기질이 있으며, 그 탑들 꼭대기에서는 항시 허공으로 막 몸을 던지려는 몽유병자의 실루엣이 보이는 것 같은데, 그런 큰 탑들을 쌓아 올려 숲을 이룰 지경인 걸 보면 그 사람들은 제정이 아닌게 틀림없다고 주장하곤 했다. >>

- 에드몽드 샤를-루(EDMONDE CHARLES-ROUX)의 저서, 자유분방한 샤넬의 인생, 1974


▲ 데이빗 심스, 2011 S/S 아리조나 뮤즈 / 칼 라거펠트, 사샤 피보바로바와 함께한 2009 <<파리-모스크바>> 공방 컬렉션


웨스트민스터 공작은 샤넬의 작품에 부정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샤넬은 공작의 트위드 재킷과 캐시미어 가디건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재해석한 작품들을 자신의 컬렉션에 내놓았다. 공작의 요트 선원들이 착용하는 베레모와 긴 바지, 이튼 홀 하인들의 조끼와 같은 작업복에서 영감을 받아 샤넬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 패트릭 드마쉴리에, 꺄트린 맥네일 Vogue UK (2010) / 라 파우자 별장에서 그녀의 개, 지고와 함께 있는 가브리엘 샤넬의 사진 (1930)


9. 새로운 세계

1925년에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를 계기로 '아르 데코' 양식이 번성하게 된다.


▲ 장 콕토,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가브리엘 샤넬의 초상 (1936) / 크리스티앙 베라르, 실내에 있는 우아한 여인 (1930)


<< 온갖 사건들이 터져 나온 실로 기이한 몇 해였다. 아르 데코의 불꽃놀이, 첫번째 초현실주의 전시회의 충격, 조제핀 베이커의 놀라운 누드와 " 라 브뤼 네그르(흑인 버라이어티 쇼)" 공연이 던진 충격, 마지막으로 프랑스 지식인들과 채플린의 공조를 가능하게 만든 영화 " 골드러시 "까지. 하지만 이 의외의 사건들이 연극처럼 펼쳐지는 가운데, 어렴풋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영상 같았던 가브리엘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

- 에드몽드 샤를-루(EDMONDE CHARLES-ROUX)의 저서, 자유분방한 샤넬의 인생, 1974


▲ 샤넬 향수와 마릴린 먼로 (1950년대)


1957년 9월, 가브리엘 샤넬은 텍사스 댈러스에서 패션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패션계의 오스카상' 이라 불리는 '니먼 마커스 상'을 수상한다. 뉴욕 타임즈는 " 샤넬만의 독특한 스타일은 풋풋한 여성스러움, 편안함 그리고 풍성한 진주장식, 이 세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젊음, 자유 그리고 삶의 즐거움을 중시하는 나라에서 샤넬의 작품은 성공할 수 밖에 없었다. "


▲ 필립 모릴론, 앤디 워홀과 세 개의 거울 (1977) / 앤디 워홀, 샤넬 (1985)


10. 샤넬 정신

1910년, 샤넬은 파리 깡봉 가 31번지에 있는 건물을 산다. 그곳에 매장과 작업실, 서재 공간을 만들고, 패션쇼 공간도 만들었다.


▲ 더글라스 커클랜드, 가브리엘 샤넬의 사진 (1962) / 알렉산더 리베르만, 아파트 안에 있는 가브리엘 샤넬의 사진 (1957)


<< 샤넬의 컬렉션 하나하나는 고독한 귀환이자 그녀가 결코 이야기한 적이 없는 자신의 과거, 그 과거의 비밀 속으로 떠나는 길고도 은밀한 여행 같은 것이었다. >>

- 에드몽드 샤를-루(EDMONDE CHARLES-ROUX)의 저서, 자유분방한 샤넬의 인생, 1974


▲ 커티스 모펫, 파리 깡봉 가 31번지 계단에서 (1925년경) / 세실 비튼, 모직 재킷을 입고있는 마드모아젤 샤넬, Vogue Paris (1935)


그녀가 직접 그 공간을 꾸몄는데, 주로 흰색을 쓰면서 곳곳에 검은색으로 포인트를 주고, 벽면을 거울로 뒤덮었다. 아래위층을 잇는 나선형 계단과 그 벽면을 따라 이어 붙인 거울 덕분에 손님들은 새 의상을 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모델들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고, 한편 가브리엘 샤넬은 계단 꼭대기에서 몰래 아래층 전체를 엿볼 수 있었다.  이 공간에는 그녀가 아끼는 오브제와 가구, 책,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이곳은 그녀의 미학적 행로가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며, 코드와 상징으로 가득찬 그녀만의 온전한 세계를 보여주는 곳이다.


▲ 칼 라거펠트, 2013 S/S 후프백 / 마드모아젤 샤넬의 진주 목걸이의 재해석


▲ 칼 라거펠트, 2009 S/S 하이디 마운트와 함께한 광고 / 엘렌 폰 운베르트, 1993 F/W 원피스를 입고 있는 나디아 아우어만, Vogue Paris (1993)

 
늘 움직이고 있어 잡을 수 없는 샤넬.. 그녀는 더 큰 자유를 위해, 궁극적인 호사스러움을 찾기 위해 떠났다. 그녀에게 있어 호사스러움이란 '자유' 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오브제들과 작품들에서 샤넬은 피난처를 찾았지만, 그것은 항시 일시적이었다. 그녀를 잠시나마 붙들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아마도 비물질적으로 존재하는 향수의 세계일 것이다. 잘 알려졌듯이 샤넬은 반사적이라고 할 만큼 향기에 대단히 민감했다. 그녀의 향인 N˚5는 늘 그곳에 있다. 샤넬의 자리를 정하기 위해, 그녀가 어디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기 위해, 그건 틀림없다.


(재)한국컬러앤드패션트랜드센터


출처 ------------------------------------------------------

www.culture-chanel.com
www.myraparis.com/2011/07/coco-chanels-private-apartment-rue.html
www.flickr.com/photos/poonks/5671452703/
presentcorrect.blogspot.kr/2013/08/gabrielle-coco-chanels-apartmen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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